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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 특강) "기독교 신비주의란 무엇인가"-영성학자 유재경 박사가 풀어주는 기독교영성의 본질
기독교 신비주의와 거룩

신비주의는 모든 종교와 비종교적 체계 안에 존재하는 현상이다. 기독교 역시 많은 신비적 요소를 담고 있다.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은『고백록』9장에서 그의 어머니 모니카와 함께 경험한 신비를 기록했다. 두 사람은 이탈리아에서 고향 북아프리카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어느 날 놀라운 체험을 한다. “사랑의 불꽃이 강렬하게 타오름” 과 “영원한 하나님을 향해 높이 올라감”을 경험했다. 이것은 감각과 비물질적인 영혼의 영역을 초월한 세계였다. 그는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는 이처럼 말하고 전심전력 다하여 그 지혜를 향해 목말라 하는 동안 우리는 순간적으로 그 지혜와 약간 접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긴 한숨을 쉬면서 “영의 첫 열매”(8:23)를 그곳에 묶어 남겨 둔 채 우리는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인간의 말로 되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우리 주님, 그러나 인간의 말은 당신의 말씀에 전혀 비교될 수 없습니다. 당신의 말씀은 항상 자체 안에 머물러 있어 낡아짐이 없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1)""

어거스틴과 모니카는 영원한 지혜를 맛보았다. 이들은 물질과 비물질적인 세계를 벗어났다. 이들은 영혼의 경계에서 신적 말씀의 영역으로 더 높이 올라갔다. 어거스틴이 신플라톤 사상에 영향을 받았든 그렇지 않든 기독교인으로서 그는 신비를 경험했고 그 세계를 설명했다. 이와 같이 신비는 기독교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1. 신비주의란 무엇인가
1)왜 신비주의인가

하나님의 현존을 의식하거나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신비주의란 주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주제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신비주의가 뭐냐? 신비주의가 우리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다. 하지만 기독교란 특정한 종교적 맥락에서 봐도 신비주의는 엄벙덤벙 넘어갈 수 없는 주제다. 기독교는 복음을 선포하는 종교이고, 기독교 안에서 구체화된 신비주의는 복음의 통로 역할을 한다.2) 복음은 하나님의 신비를 묵상하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 모두의 것이다.

복음의 신비는 지역과 공동체의 특성에 따라 다른 형태를 취했다. 신비주의는 복음의 신비에 대한 확신이고, 우리가 신앙생활 가운데 직면하는 도전과 응전의 목소리다. 특히 기독교 신비주의는 “하나님은 사랑이다”는 단문에 다 녹아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고, 하나님은 우리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건강한 삶을 경험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기도와 묵상, 그리고 침묵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고 그의 현존을 경험한다. 우리가 그분의 사랑의 본성에 참여함으로 영적 치유와 새 삶을 체험한다.

다른 한편으로 신비주의는 현실에서 환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위험한 사상으로 알고 있다. 실재적이고 냉소적인 사람들은 신비주의를 함정으로 생각한다. 특히 서구 사회는 검증 가능한 것을 믿는다.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있어야 사실로 받아들인다. 자연주의적 세계관에서는 인간이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에 영적이고 신비적인 세계는 존재할 수 없다. 영원한 사랑 같은 신비적 비전은 받아들 수 없다.

인간은 자연의 한 부분으로 인식하하면서도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기를 꺼린다. 여기서 신비주의가 싹튼다. 즉 삶의 의미와 희망을 갈망하는 인간의 심성에서 신비주의가 나온다. 인간은 일자(the one)든 실재든 그 무엇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인간의 가능성을 긍정한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우리는 모두 하나님에 참여 한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존재하고, 나는 나로 존재하고, 너는 너로 존재한다. 하지만 기독교 신비주의가 묘사하는 하나님의 영원성은 시간과 공간이라는 물질적 한계를 초월한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하나님의 초월 속에서 인간의 가능성을 본다. 그래서 기독교 신비주의는 ‘하나님과 함께 능하지 못하심이 없느니라’(1:37)는 구절을 좋아한다. 이와 같이 신비주의는 인간이 자기 한계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그곳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2)신비주의의 어원과 정의

(어원)

영과 영성의 개념과 깊이 관련된 명사 형태의 신비주의(mysticism)는 현대적 언어이다. 신비주의는 16세기 프랑스에서 처음 사용했고, 다른 유럽 국가로 확산되었다.3) 옥스포드 영어사전에는 신비주의(mysticism)란 단어를 1736년에 처음 영어로 사용된 신조어로 기술하고 있다.4) 신비주의의 개념과 의미는 20세기 초에 광범위하게 연구되었지만 아직도 정확하게 정의내리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신비(mystical)와 같은 형용사 형태는 고대 그리스에서 그 원형을 찾아 볼 수 있다. 용어 μυστικός는 ‘숨김’의 의미를 가진 그리스 동사 μυω에서 유래되었다. 신비(mystics or mystical)란 용어는 신비적 종교에 헌신하는 사람 그리고 비밀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과 관련되어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신비 종교에 나타나는 숨겨진 의식(cult) '침묵으로 남아 있는 비밀'이다. 따라서 신비는 궁극적 실재 또는 영적 존재의 직접적 체험과 통찰을 통한 교제와 일치를 추구하는 종교의식 가운데 발생한다. 그런데 여기서 언급하는 신비는 신비의식 속에 숨어있는 비밀, 언어적 의미에서는 순수한 의례(ritual)이다.

(정의)

신비주의는 정확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신비주의의 대가 버틀러(Dom Cuthbert Butler) 역시 “우리 시대에 신비주의만큼 잘못 사용되고 있는 용어도 없다”5) 고 한다. 최근에 맥긴(Bernard McGinn)은 신비주의는 학자마다 다른 의미와 내용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일치된 정의를 찾기 힘들다고 했다.6)

하지만 루터교 신학자 하일러(Frideich Heiler)는 “신비주의를 자아와 세상이 완전히 부정되고, 인간의 성품이 하나님의 무한 속에 흡수 소멸되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형태”로 정의 했다.7) 영국의 철학자 럿셀(Bertrand Russell)은 신비주의를 세 가지로 분류하여 정의 했다. 첫째, 신비주의는 분석적 지식에 반대되는 통찰로부터 오는 믿음이다. 둘째, 신비주의는 일치(unity)안에 있는 믿음이지 분리는 아니다. 즉 헤라클리투스(Heraclitus)의 말처럼 ‘선과 악은 하나이고, 높은 것과 낮은 것도 하나’라는 것이다. 셋째, 모든 신비주의의 형이상학은 시간의 실체를 부정한다.8)

따라서 신비주의는 내적 경험을 강조하는 종교 또는 비종교 환경에서 발견되는 영적인 차원에 대한 진술로 표현할 수 있다. 신비주의는 하나님 또는 궁극적 실재와의 초월적 만남을 추구한다. 나아가 신비주의는 인간의 추론적 사고를 넘어 하나님과 인간의 일치된 직접적인 느낌 또는 경험이라고 정의 할 수 있다.

3)신비주의의 본질

신비주의의 본질을 밝히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신비주의는 연구 분야가 광대하고, 신비경험의 분류와 해석도 학자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비주의의 정의와 신비경험에 기초하여 다음과 같이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신비주의는 최고 실재에 대한 관심이다. 세계의 모든 종교는 인격적이든 비인격적이든 최고 실재를 경외한다. 기독교 신학은 신의 현현(epiphanies)이라는 말로 그런 경험을 구체화하고 있다. 최고 실재 또는 궁극적 존재에 대한 관심과 경험은 종교와 철학에 따라 이름과 형태는 다르지만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둘째, 신비주의는 경험 또는 최고 실재에 대한 의식적 깨달음과 관련되어 있다. 완전을 추구하는 자아와 절대자 사이의 영적이고 초월적 관계에 따라 자아는 변화된다. 신비주의는 최고 실재를 경험한 자아의 상태와 태도에 달려 있다.

셋째, 신비주의는 종교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 종교는 사람들이 신비와 접촉하려는 일반적 열망과 관련된 사회·문화적 현상이다. 그러나 신비주의와 종교는 긴장 관계 속에 놓여 있다. 확실히 신비주의는 종교적 제도를 요구하지 않지만 종교는 신비적 요소 없이 형성될 수 없다. 따라서 신비주의는 그 본질에 있어서 종교적일뿐 아니라 종교의 내면적 차원이다.9)

넷째, 신비주의 경험은 인간의 생활양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영적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금욕, 묵상, 관상과 같은 정기적인 기도훈련을 한다. 이것은 신비적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초월적 경험에만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 삶도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비주의는 삶의 일상적 양식이다.

다섯째, 신비주의는 전적으로 영적 활동이다. 신비주의는 영적활동이라는 표현은 마술과 달리 신비가는 현세적 도움과 이익에 관심이 없다. 그는 단지 보이지 않는 것의 도움을 통해 보이는 것을 건강하게 한다. 신비가는 이 세상과 영의 세계 즉 두 세계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는다. 신비가의 목적은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비가의 모든 관심은 영원에 있고, 영적세계에 있다.

이와 같이 신비주의는 특별한 형태의 궁극적 실재에 대한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절대자에 대한 경험은 결국 인간의 고차원의 의식과 깊은 관계가 있고, 이것은 결국 종교의 교리와 제도를 넘어 종교의 경험적 본질의 부분인 영적인 활동인 것이다.

2. 기독교 신비주의란 무엇인가
1)기독교 신비주의의 정의

신비주의란 용어는 그리스종교에서 시작해 16세기 유럽에서 발전되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성경에는 신비주의(mysticism)란 용어와 일치하는 단어가 없다. 형용사 신비(mystikos, mystical)는 신약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10) 하지만 포괄적 의미의 신비는 성경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신약 성경에는 신비(mystery)라는 단어가 27번 나온다. 고린도전서는 ‘죽음 후의 삶에 대한 기독교인의 신앙을 신비로 묘사했다’(고전15:31). 골로새서도 ‘하나님의 신비는 모든 세대에 숨겨졌지만 그 신비는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라고 표현하고 있다(1:26-27).

둘째, 신비주의의 넓은 의미인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나타내는 본문은 성경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에스겔은 그발 강가에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모습을 직접 본 경험을 기록했다(1-2). 누가는 바울이 다메섹에서 하나님을 직접 만난 사건, 즉 회심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9:3-9). 다메섹 사건은 바울의 신비체험이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를 신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요한복음은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14:21)고 했다.

셋째, 성경 본문은 합리적 이성으로 해석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성경의 많은 본문들은 하나님의 초월성과 인간이 하나님의 초월에 참여할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는 해석할 수 없다. 요한일서 3장은 1절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라고 했다. 갈라디아서 220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한다. 이 본문들은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 그리고 인간이 신성에 참여할 수 있는 신비적 의미를 배제하고는 해석하기 곤란하다 .11)

성경은 ‘신비’ 또는 ‘비밀’이라는 표현을 직접 사용하고 있다. 성경의 저자들은 자신이 경험한 초월적 하나님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겼다. 또한 성경의 많은 본문들이 지성적 시각에서는 해석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 이와 같이 성경의 신비적 표현들은 신비주의란 용어와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신비주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풍부한 자료이다.

2)기독교 신비주의의 발전과정

신비주의는 어원학과 역사학의 연구에서 지적하듯이 그 기원이 그리스이다. 그런데 그리스 신비주의가 어떻게 기독교 신앙의 세계에 들어오게 되었는가. 기독교 신비주의는 그리스 신비주의의 발전적 형태의 한 양상에 불과한가. 기독교 신비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약성경의 배경인 헬레니즘 세계의 언어, 철학, 그리고 종교의 연구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스의 신비주의는 ‘눈을 감고, 입은 닫는다’(to close or to shut)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다른 자료에 따르면 신비주의의 용어에 ‘신비에로 안내하다’ 즉 ‘가르침’의 의미가 있다.12) 따라서 신비주의는 ‘감음’, ‘감춤’, ‘비밀을 배움’, ‘들음’과 관련되어 있다.

신비주의는 고대의 이방 종교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이방 종교는 다양한 신화의 세계와 관계된 신들과 연결되어 있다. 고대 종교에서 신의 비밀이 드러나는 곳은 의례(ritual)이고, 사람들은 의례에 참여함으로 그 비밀을 얻을 수 있었다. 헬레니즘 종교 안에 신비는 표현할 수 없는 종교적 지식이 아니라 순수하게 물질적 양식 안에 있는 의례이다.13) 의례 자체가 신비인 이유는 의례들이 신비적 경험과 신비적 의식(consciousness)을 강화하는 상징적이고 영적인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그리스-헬레니즘 신비주의보다 후대에 나타났다. 어원학적인 면에서 기독교 신비주의의 신비라는 용어는 그리스 신비주의에서 빌려왔다. 하지만 기독교 신비주의는 이방 신비주의로부터 어떤 신비적 가르침도 빌리지 않았다. 신약 성경에 나오는 감춤(hiddenness)의 개념과 초기 기독교 신비가들의 사상에서 사용된 신비는 이방 신비주의에서 사용하는 신비는 많은 차이가 있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은 의례의 비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성경, 성례전, 그리고 하나님의 인격적 만남에서 계시된 비밀을 이야기했다.14) 그러므로 기독교 신비주의는 그 초기부터 성서와 기독교 신학에 그 뿌리를 두고 발전해 왔다.

3)기독교 신비주의의 본질

신비주의와 기독교 신비주의는 어원적 이해와 발전 과정이 다르다. 그러면 기독교 신비주의는 신비주의와 본질적 차이는 무엇인가. 첫째, 기독교 신비주의는 하나님의 개념에 근거를 두고 있다. 기독교에는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이론을 가지고 있다. 기독교 하나님은 세 다른 위격으로 구성된 삼위일체 하나님일 뿐 아니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형태를 취했다. 성육신과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핵심일 뿐 아니라 기독교 신비주의의 중심이다. 따라서 기독교 신비주의는 하나님의 이러한 존재형태와 함께 신적 삼위일체에서 그 독특성을 가진다.

둘째, 기독교 신비주의는 그리스 신비주의와는 달리 성경 해석을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 초기 교부인 클레멘트와 오리게네스는 기독교 안에서 가장 어렵고 힘든 신학적 문제들을 다루기 위하여 신비란 단어를 사용했다. 이들은 신비의 개념을 통해 성경의 알레고리적 의미를 밝히고, 성경을 주석했다.15) 이러한 성경해석은 초기 교부들의 작품과 중세의 신비주의 신학을 거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기독교 신비주의를 형성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되었다.16)

넷째, 기독교 신비주의가 성례전 특히 성만찬의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시릴의 텍스트 안에서 이러한 변화를 찾아 볼 수 있다. 그는 이사야 주석에서 신비란 단어를 성만찬과 함께 사용했고,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이 성경의 성취 개념에서 성례전적 실재의 개념으로 변화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존 크리소스톰 역시 신비적 음식 그리고 신비적 연회란 표현을 사용했다. 성찬 전체를 신비적 의식(cult) 또는 신비적 의례(rite)라고 불렀다.17) 따라서 기독교 교부들에게 있어 신비란 표현은 성례전과 함께 쓰였다.

다섯째, 기독교 신비주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는 숨겨진 의미와 변화이다. 사도 바울이 성경에서 사용한 신비란 용어는 ‘오랜 세월 동안 감추어져 있던 것이 이제 나타나 보이신’의 의미를 기초로 하여 사용되었다.(로마16:25) 이것은 하나님께서 오래전에 계획하신 것이 때가 차서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된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복음이 곧 신비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헤아릴 수 없는 깊고 풍부한 의미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3. 기독교 신비주의와 거룩
1) 거룩과 신비주의

거룩(holiness)은 영적 현상을 설명하는 핵심 단어다. 거룩은 모든 종교에 주어진 바탕일 뿐 아니라 그 속에 깊이 스며있는 현상이다. 거룩은 신적인 것의 독특한 표시이고, 신성한 것의 본질적 속성이다. 거룩은 신성의 많은 실재들의 속성이 아니라 다른 모든 신성한 속성들을 신성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속성이고, 최고 실재의 본성에 대한 표현이다.18) 물론 마레트(R.K. Marrett)에 따르면 원시종교에서 종교적인 의식은 ‘마나’(mana)'터부'(tabu)의 형태로 나타난다. 여기서 마나는 선과 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힘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 마나는 원시인들의 삶에 관계된 이러한 힘들에 대한 태도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19)

하지만 오토(Rudolf Otto)는 거룩(holy)이란 용어를 중심으로 모든 종교의식의 구조를 분석했다. 오토는 거룩성(holiness)이란 단어가 인간의 판단이 가미된 도덕적 선이라는 합리적 특성이 포함되어 있지만 합리적 특성만으로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따라서 그는 거룩의 개념을 비이성적이고 비감각적 경험인 누미노제(numinose)로 설명하고 있다. 누미노제는 누멘(numen)에서 파생된 언어로 거룩한 것은 본질적으로 인식될 수 없으나 거룩이라는 단어 안에서 인지될 수 있다. 오토는 종교의 근본적인 의식을 거룩으로 설명하면서 거룩이 원초적으로 마나(mana)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이해했다.20)

기독교에서 거룩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경험과 행동, 그리고 그들의 역사와 세계를 이해하는 본질이다. 기독교 하나님은 그 자신이 거룩할 뿐 아니라 그와 함께 한 백성들도 거룩할 것을 요구한다. 레위기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레위기11:45)라고 했다. 구약성경에서 거룩이 넓고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지만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구별’과 관련되어 사용되었다. 이와 더불어 에스겔서는 신적인 거룩, 성전, 제의 등과 더불어 거룩을 사용하고 있다. 레위기는 하나님께 받쳐진 것과 하나님께 헌신된 사람과 관련해서 거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21)

신약성경은 구약의 “하나님은 거룩하다”는 고백을 재확인하고 있다. 요한 계시록은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시라”(4:8)라고 하나님의 거룩을 묘사한다. 나아가 신약성경은 거룩을 예수 그리스도에 속한 것으로 언급한다. 누가복음은 특별히 예수님의 탄생과 관련하여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1:35)고 했다.22)

성경은 장소와 물건 그 자체를 거룩하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현존이 장소나 물건의 거룩성을 결정한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를 부르실 때 그가 선 땅을 거룩한 땅이라고 했다(3:5). 이 때 거룩한 땅은 하나님이 계신 땅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출애굽기 19장에 시내산이 거룩하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의 접근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 하나님께 계시기 때문에 거룩한 곳이 되었다(19:23). 하나님의 현존이 곧 거룩이라는 사상은 종교개혁자들의 사유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루터는 하나님은 홀로 본질적으로 거룩하다고 강조했다.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거룩은 그로부터 온다. 그래서 루터는 그(하나님)로부터 분리된 것은 결코 거룩이 아니라고 했다.23) 하나님의 거룩은 그의 현존에 의해 전달되고, 그 현존은 신적인 사역 가운데 이루어진다. 루터는 기독교의 거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 우리 주는 거룩하다. 그래서 그의 백성도 역시 거룩하다. 따라서 믿음으로

걷는다면 우리 모두는 거룩하다. ······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주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모든 선한 것을 공유하는 것이다. 지금 그리스도가 거룩하므로 그리스도인도 거룩하다.24)"

그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룩을 이야기하면서 그의 백성이 그와 함께 있으면 거룩하다고 했다. 그런데 기독교인의 거룩은 세상의 거룩과는 구분된다고 한다. 세상의 거룩과는 달리 기독교인의 거룩은 수동적이기 때문에 그 자신의 삶의 방식과 공로를 통해 거룩을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25) 이와 같은 기독교의 거룩은 기독교 신비주의의 본질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초월을 경험하는 것에 관심이 있다. 앞에서 기독교 신비주의는 성경의 해석과 성례전, 그리고 영혼의 상승 즉 정화 과정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다고 했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본질인 거룩에 대한 관심으로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므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 신비주의의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거룩의 개념은 기독교 신비주의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적용

-신비주의의 만큼 많은 오해와 억측에 시달린 개념도 없다. 어떤 사람들은 신비주의를 신비적 제의나 마술과 동의어로 생각한다. 심지어 신비주의란 단어에서 해리 포터의 마법사가 연상될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은 환상이나 이상한 체험 또는 엑스타시가 신비주의의 본질로 이해한다. 하지만 포스터모던은 합리적 이성이나 보편적 진리 보다는 감성과 체험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요즘 쏟아지는 수많은 도서들이 자기계발서이다. 이러한 도서들은 인간 내면세계 탐구와 가능성에 올인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인문학 강좌, TV 특강을 통해 창조적 아이디어를 찾고, 새로운 상상력을 갈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오늘 우리 사회의 문화와 삶의 패턴은 신비주의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만약 신비주의와 기독교 신비주의가 추구하는 기본적 정신을 바로 인식한다면 오늘 우리는 사회와 목회현장을 보는 시야가 넓고 깊어질 것이다.

무엇보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개념에 근거해 있다. 기독교 신비주의의 발전은 성경해석과 성례전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궁극적으로 기독교 신비주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에 있다. 따라서 기독교 신비주의는 성경과 기독교 신학의 전통에 서 있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여타의 신학과 마찬가지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찾고 만나고 즐거워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데 있다.

- 기독교 신비주의는 다른 신학과는 달리 하나님과 관계하고 경험하는 집중한다. 하나님의 현존 의식,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고 경험하는데 있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기독교 영성의 한 부분이지만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체험을 탐구하는데 목적이 있다. 그러면 기독교 신비주의가 목회자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

현대사회는 추론적이고 논리적인 진리보다는 체험적 진리를 원한다. 교회의 강단도 하나님의 체험, 경험을 강조한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임재 경험에 목말라하고 있다. 무엇보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한다.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해야 한다. 나아가 하나님을 직접 체험하고 끊임없이 그분과 교제할 수 있게 도와줘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기독교 신비가(영성가)들의 책을 통해 하나님의 경험과정과 내용에 대해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 신비가들의 가르침과 경험을 통해 하나님과 깊은 교제의 삶으로 나갈 수 있다면 우리의 목회는 더 풍성해질 것이다.

-오늘날 목회자들은 설교 준비에 여념이 없다. 말씀을 정기적으로 묵상하겠지만 설교 준비를 위해 말씀을 묵상한다. 성경을 읽고 연구할 때 본문연구, 역사 문화적 배경, 본문의 의미를 탐구할 것이다. 설교를 위한 본문 연구는 목회자들에게 쉽지 않는 사역이다. 그런데 기독교 신비주의는 하나님의 경험, 관계를 중요하게 여긴다. 성경의 기본이해를 기초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와 경험의 측면에서 이해한다면 성경의 행간을 넘나들며 새로운 의미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본문 말씀 그 자체를 체험한다면, 성경을 체험적으로 읽어낸다면 우리의 삶은 물론이고 우리의 설교도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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