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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특강) '기독교 기도의 본질 '-영성학자 유재경 박사가 전하는 기도의 본질과 훈련

1. 관계, 하나님의 본질

기독교 영성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말할 때 하나님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는 단순히 하나님의 개념이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을 말해야 한다. 하나님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라 구체적인 관계 속에서 만나는 존재이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곧 기독교 하나님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최근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주제가 새로운 관심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기독교 영성과 특별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특히 실천적 삼위일체에 대한 관심은 초기 교회의 영적 경험 안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사유의 기원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존재하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동시에 시간과 공간 안에서 내재적으로 존재하는 분이다. 따라서 초기 기독교 신조는 하나님을 스스로 존재하는 삼위일체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으로 고백했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험을 통해서 초기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그 시대의 철학과 종교에서 이해하고 있는 신을 구별했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의 관계에서 가장 독특한 분임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모든 세계가 존재하는 장소일 뿐 아니라 근원이다. 해서, 시편 기자는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90:1-2)라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 바울도 사도행전에서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17:28)라고 했다. 성경은 하나님을 모든 것의 창조자로서 다른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기독교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성령의 경험 속에서 체험되고 발견된다. 이와 같이 삼위의 하나님에 근거한 신앙은 그 출발부터 기독교의 독특성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때문에 기독교 영성은 삼위일체 영성인 것이다.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단순한 추론의 조각들이 아니라 기독교적 삶의 참된 부분이다. 삼위일체의 신앙은 하나님이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삶에 대한 가르침이고, 우리가 서로 서로 함께 존재해야하는 우리의 삶에 대한 교훈이다. 따라서 기독교 영성에서 말하는 하나님과의 교제는 우리와 하나님, 아들과 성령이 함께 나누는 사랑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분리된 기독교가 있을 수 없듯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가 없는 기독교인 역시 상상할 수 없다. 사실 계시의 하나님은 스스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참된 관계가 가능하도록 인간이 되어 내려오셨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둘 사이의 관계에 의존한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과의 관계에 대한 일정한 패턴을 보여주고 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다가오셔서 관계를 제안하시고,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초대에 반응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드러내셨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시기 위해서 연기와 불 가운데 내려오셨다.(19:18-19) 시편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19:1)라고 했다. 하나님은 사사들과 왕들을 통해 그의 백성을 위해 일하셨다. 하나님은 예언자, 역사가, 그리고 시인들을 통해 그 분의 행동과 말을 성경 안에 기록하셨다. 게다가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모습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셨고, 자신의 궁극적 목적을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실현하셨다. 아울러 하나님의 능력은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드러나셨다. 종국에는 하나님은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드러나셨다.

2.영혼, 관계의 핵심적 자리

-하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과 신성한 경험을 나누시기 원하신다. 여기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교제는 우리 자신의 아픔과 고통, 기쁨과 감사의 경험을 하나님과 나누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반응 즉 교제의 결과는 인간의 결정과 행동을 통해 전인적으로 드러나겠지만 반응의 핵심적 자리를 영혼이다. 영혼은 인간의 모든 차원을 통합하여 하나의 삶을 이루는 차원이다. 성경과 기독교 신학은 영혼과 육체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지 않지만 영혼은 기능적인 측면에서 한 인간의 인격을 형성하는 모든 요소들과 상호 관계할 뿐 아니라 직접적으로 인간의 생각과 감각적 부분들을 구성한다. 아울러 영혼은 인간의 다른 요소들을 통해 하나님과 창조의 깊은 세계에 이르게 한다.

-영혼은 인간 전 존재를 감싸고 만들어감으로 인간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우리는 자연스럽게 영혼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간을 대변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첫째, 인간의 가장 깊은 차원으로서 영혼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표상된다. 우리는 감각 기능을 통해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과 만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깨달을 수 있다. 중세의 영성가들은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로 영혼을 이야기 했을 뿐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관계와 정도를 강조하기 위해 영혼의 중심이라는 표현까지 사용했다. 하지만 영혼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다른 기관들과 구분되는 것으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전인성의 의미로 사용했다.

-둘째, 영혼은 인간존재의 총화로서 영성이 형성되는 자리이다. 육체의 다양한 기관들이 활동들과 함께 영혼도 활동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영혼은 인간의 감각적 기능과 정신적 기능들을 본래의 상태로 회복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때문에 우리 영혼은 아주 포괄적이고 근원적이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도다.(42:5)라고 한다. 누가복음은 “또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12:19)라는 말씀으로 어리석은 부자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와 같이 영혼은 하나님과 만나는 핵심적 장소이다. 이 장소는 인간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닮아가는 자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갈망하고 듣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3.기도, 관계의 핵심적 요소

-기독교 영성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이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 기도이다. 영적인 삶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고, 그 분의 이끄심에 순종하는 것이다. 기도가 어떻게 시작되고 진행되든지 기도는 우리 안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활동하셔서 생겨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일어나도록 만드셨다.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기도로 인도하신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우리가 연약한 중에 우리를 도우시며,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 하신다”(8:26)고 말씀하신다. 성령이 우리 안에 기도하고 우리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핵심인 기도(prayer)는 라틴 동사 프레카리(precari)로부터 왔다. 그 의미는 ‘빌다’, ‘간청하다’이다. 이 단어는 사람과 관련하여 사용할 수 있지만 기도는 특별히 하나님과 관련해서 사용되었다. 기도가 히브리어 히파렐(hitpallel)과 헬라어 프로슈케(proseuche)로 그 의미는 역시 청원 또는 간구의 표현이다. 이 기도는 초기 기독교 역사에서는 간구 또는 청원,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21절은 기도를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로 언급하고 있다. 기독교 초기 신학자들은 이 네 가지를 기도의 다른 형태들로 이해했다. 하지만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기도를 경배, 고백, 헌신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6:9-13; 11:2-4). 구약성경 시편 역시 기도의 중요한 텍스트로 초기교회부터 사용되었다.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살전 5:17)고 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도는 아주 넓은 의미로 이해되어 왔다. 근원적으로 기도는 청원이라는 특별한 의미뿐만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넓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넓은 의미로 기독교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기도가 교제라는 것은 기도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따라서 기도는 하나님과 그의 자녀 사이에 일어나는 상호관계이다. 사람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지만 건강하고 생명력이 있는 관계는 서로 간에 대화 시간이 많아야하고 지속적이어야 한다. 더욱이 솔직한 태도와 진실한 내용이 있는 대화가 이루어져야 관계는 깊어진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을 닮기 위해서, 그리고 그 분과 교제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기도한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기도는 대화이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삼위일체 하나님이 ‘대화적 존재’라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먼저 말을 걸어오시는 분이요 인간의 말을 듣기 원하시는 분이다. 마태복음은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7:7)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친구와 같이 하나님과 마음을 열고 자유롭게 대화할 수 있다.

4. 듣는 기도

-기도는 하나님과의 소통이다. 소통은 한쪽에서 행하는 일방적 독백이 아니라 상호 인격적 관계이다. 기도는 또한 서로의 관심, 기대, 그리고 친밀감을 나누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도는 말하고, 듣는 소통의 과정이다. 기도는 단지 우리의 필요를 간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오히려 사무엘처럼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9)라는 태도에 있다. 듣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응답하시도록 기다리는 것이다. 듣는 기도는 일방적인 청원이 아니라 쌍방의 대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듣는 기도는 하나님께 간청한 후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더 나아가 듣는 기도는 광범위한 기도의 자세로 하나님께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고, 참된 근원에 마음을 두는 것이다. 마음의 눈과 귀를 통해 하나님을 보고, 그의 음성을 들으며, 마음을 통해 물질적인 세계를 넘어 초월적인 하나님을 이해하는 것이다.

1)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이유

-우리 인생은 날마다 결단을 요구 받고 있다. 우리는 날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하고, 결정을 위한 지침이 필요하다. 일상생활 가운데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물건을 사야할까? 어떤 직장을 선택해야 하는가? 헌금을 얼마나 내야 하나? 어떤 배우자를 만나야 하는가? 우리는 이러한 질문과 함께 하루하루 이 땅에서 살아간다. 이와 같은 삶의 정황 속에서 구체적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창조하시고,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주셨다. 하지만 여전히 경제적이든 정치적이든 문화적이든 필요한 것이 너무 많다. 게다가 세상의 변화는 빠르고,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는 날로 더해 간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 세상의 필요를 채우고 새로운 방법으로 세상을 인도해야 한다. 새로운 환경은 삶에 대한 새로운 지혜와 통찰력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지혜와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이 땅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갈등의 중심에 서 있다는 것이다. 국가는 국익이라는 문제를 놓고 외교전을 펼친다. 사회는 경제 정의와 인권의 문제를 놓고 갈등한다. 가정은 부부와 자녀간의 이견차이를 좁히지 못해 힘들어 한다. 수많은 갈등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경험과 지성을 동원하지만 더 이상 진전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그분의 생각을 들어야 한다. 우리는 조용히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 각자에게 주시는 말씀을 경청해야 한다.

-우리는 예배에 참여하고 성경 말씀을 읽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을 알뿐 아니라 믿는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성경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 고민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를 원하지만 그대로 되지 않는다. 이 때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한다. 성경 말씀이 이해될 뿐 아니라 삶 속에 실현되는 것을 경험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의 이해를 도우시고, 우리의 생각을 바꿔주셔야 가능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이 나를 변화시키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시편 377절은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세밀한 인도가 필요할 때가 있다. 내가 병들었을 때 어떤 병원, 어떤 의사를 만나야 하는가? 어떤 약을 먹고, 어떤 수술을 받아야 할까? 때때로 생사가 달린 문제로 고민할 때가 있다. 우리는 급한 마음에 친척이나 친구, 그리고 교회의 식구들 가운데 의료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찾는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서도 일 하신다. 하지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어려움과 위험 가운에 처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손길, 그분의 인도하심을 경험해야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분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살아야 한다.

2)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방법

하나님의 자녀는 누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예수님께서 ‘양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고 하셨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망하느니라”(10:3-5).

목자이신 예수님은 양 하나 하나와 친밀한 관계를 가지고 계신다. 그 분은 양들에게 말씀하시고 우리는 듣는다. 독특한 품성을 가지고 있는 양들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을 수 있을까?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기대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기대는 다가올 미래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에 대한 믿음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 말씀하신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33:3).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우선 하나님의 성실성에 기초를 둔 기대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우리를 향해 말씀하신다는 언약의 말씀에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한다.

듣는 자의 기본자세는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시는 삶을 보여주셨다. 그는 하나님과 하나임을 말씀하셨고, 아버지의 음성을 듣기 위해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다. 그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일에 집중했다. 예수님의 모든 지혜와 말씀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우리는 매일의 분주함으로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지 못할 때가 많다. 하나님을 찾을 때도 단지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 찾는다. 그러나 개인적 필요보다 먼저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개인적 요구나 필요보다 하나님의 목소리, 그 자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고요한 가운데 기다리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수 있도록 조용한 가운데 기다려야 한다. 시편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46:10)이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기도를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아뢰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요망사상을 보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고, 듣지 않는데 하나님은 어떻게 말씀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침묵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필수 요소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는 기다리는 시간과 고요한 침묵의 시간이 필요하다. 초기교회부터 수많은 신앙인들이 사막과 고요한 수도원에서 하나님을 찾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잠시 문명을 뒤로하고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이다. 열왕기상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작고 세미한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왕상19:12)

*자기 의지를 포기하고 순종하라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그 분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자기를 내려놓아야 한다. 우리가 모든 길을 하나님과 함께 걷기 원한다면 그 분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지만 더 나은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신다. 자신의 의지를 포기한다는 것은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인간적인 감정과 욕망 그리고 세속적인 추구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음성을 듣기 힘들다. 우리의 머릿속에 일과 돈과 자녀의 문제로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음성을 듣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버리고 예수님을 온전히 마음에 모실 때 하나님은 역사하시고 그 분의 뜻과 음성이 우리에게 임한다.

자기의 의지를 포기한다는 것은 곧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맡기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성취하고 싶었던 일은 결국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곧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한 비결은 예수님처럼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께 순종하는데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를 던져 버리고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정결한 마음으로 나아가기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과 육체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셨다. 죄에서 돌이켜 바르고 정직한 삶 즉 정결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기를 원하셨다. 해서, 시편은 “내가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66:18)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에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5:8)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불의함과 외식을 꾸짖으시고 정직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를 것을 말씀하셨다. 우리의 마음 상태가 어떤가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진다. 우리의 마음이 교만과 불의로 가득 차 있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 반면, 우리가 정직한 영으로 그 분을 향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살 수 있다.

*믿음으로 나아갈 때 음성을 듣는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의 길을 인도하시며 갈 길을 알려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분이다. 히브리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11:6)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영도자 모세는 믿음으로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출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필요한 모든 답을 가지고 계신다. 지혜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언제, 어떻게 우리와 대화할 수 있는지를 알고 계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바른 판단과 바른 결정에 이르도록 인도하신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와 대화하고 교제를 통해 그 분의 뜻을 전달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할 때마다 즉각적인 음성을 들려주지 않으신다. 왜 그럴까? 하나님은 기도하는 자에게 즉시 응답하시기도 하시지만 때로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대답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응답을 받을 분량에 이를 때 까지 기다리는 하나님의 배려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종종 기다림을 통해 영적으로 성숙하기를 바라신다. 따라서 우리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응답을 늦추기도 하시고 당기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내를 가지고 믿음으로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임을 믿고 인내하며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열린 마음으로 나아가라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가 간구한 내용이나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들려올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깊고 넓으신 분이다. 따라서 우리는 복을 원하고, 필요를 채워주실 것만 바라지만 때론 우리를 책망하시기도 한다. 디모데후서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딤후 3:16)라고 말씀하셨다.

기도하는 자가 열린 마음으로 들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가 기대하는 방식으로만 다가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로하고 치유하시지만 때론 책망과 회개를 촉구하시기도 한다. 항상 우리가 소망하는 것만 듣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을 때가 많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나아갈 때 그 분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의 임재 안에 섬겨라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 마태복음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28:20)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도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15:4)고 말씀 하신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 위에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며 사는 것이 영적 삶이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할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심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의 눈이 열리고, 귀가 뜨인다. 비록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할 때조차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 객관적인 실재를 보고 느끼는 현대인들이 영적 존재의 임재를 경험한다는 것은 어렵지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기억과 믿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데 무엇보다 중요하다. 나의 생각과 의식의 흐름 속에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는지를 마음으로 살피고, 그 분의 임재를 연습하는 것은 마음의 눈과 귀로 하나님을 보고 듣는 첫 걸음이다.

5. 몸으로 듣는 기도하기

1) 몸으로 기도하기

*몸에 대한 이해

몸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그리스철학과 히브리사상의 영향으로 몸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있어왔지만 여전히 많은 기독교인들은 인간의 본질은 몸 안에 있는 영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영혼 그 이상의 존재이고, 기독교는 육체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 인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고 하신다. 몸이 성령의 전이라면 몸은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고 유지하는데 빠져서는 안된다. 우리는 사랑으로 몸을 돌보고,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몸을 통해 그 분의 사랑을 느껴야할 것이다.

사실 우리의 육체는 우리 맘에 들든지 들지 않든지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것은 평생 동안 우리를 지니고 다닐 것이고, 우리로 하여금 창조의 아름다움, 사랑과 우정의 기쁨, 성장과 변화의 선물을 경험하게 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 몸과 함께 먼 곳을 여행했고, 가정의 편안함을 누렸다. 게다가 이 몸과 함께 우리는 성공의 기쁨과 실패와 좌절의 아픔을 맛본다. 우리 몸은 때로 상처받고 치유되고, 병들고 건강을 회복하곤 했다. 우리는 이 몸 안에서 태어났고, 이 몸 안에서 병들고 죽을 것이다. 우리 몸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몸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고, 우리는 몸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해야 할 것이다.

2)기도의 두 가지 방법

*몸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기도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하고 보다 깊은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의향(intention)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나님을 의향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기를 원하는 열망을 의미한다. 우리는 침묵하며 하나님을 묵상하거나 소리 내어 하나님을 찬양하는 의향을 표현할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우리의 의향을 표현하기 위해서 우리의 신체를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찬양하면서 손을 높이 들기도 하고, 조용히 하나님을 묵상하면서 두 손을 앞으로 내밀고 손바닥을 하늘을 향해 펴면서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린다. 어떤 때는 하나님이 주실 선물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표시로 손바닥을 찻잔 모양으로 만들어 내민다. 가슴 앞에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하나님께 하루를 축복해 달라고 기도한다. 이와 같이 우리의 몸을 사용해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열망을 드러내기도 하고, 몸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기도 한다. 이와 같이 몸을 통해 우리의 의향을 드러냄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한다.

# 예) 몸으로 하나님을 향하는 기도

본문: 사무엘하 6:6-21

하나님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과 교제하기를 원하신다. 다윗왕은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가는 동안 기뻐 춤을 추면서 두려움 없이 몸으로 예배했다. 그의 아내 미갈의 비웃음에도 다윗은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라고 옹호했다. 성경에서도 종종 심오한 기도는 하나님 앞에서 움직임과 몸짓으로 참된 자아의 표현했다.

-첫째, 방해 받지 않고 몸으로 기도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찾는다.

-둘째, 다윗 같이 자신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선다.

-셋째, 여호와 앞에서 자신의 기쁨이든 슬픔이든 자신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쏟아낸다.(만일 내면에서 다른 감정이 솟아오른다면 그것들도 움직임으로 표현한다)

-넷째, 몸으로 드린 기도의 경험을 깊이 숙고한 후, 영적 일지에 생각과 느낌을 기록한다.

*몸으로 하나님의 음성 듣는 기도

몸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거나 하나님의 계시에 주목할 수 있다. 우리의 듣고, 보고, 느끼는 몸의 감각을 통해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Barbara Brown Taylor)는 “우리 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시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고 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체적 감각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시고, 그 분이 우리와 함께 계심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들에 핀 한 송이의 꽃을 보고, 새들의 노래 소리를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경험한다. 어떤 이는 십자가와 성경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하나님을) 인식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만든 세계 속에서 우리는 몸을 통해 하나님의 세계를 경험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 예) 몸으로 음성 듣기

본문: 시편 104

시편 104편은 하나님의 창조의 위대함을 찬양한다. 시편기자는 땅과 하늘에 있는 피조물의 세세한 것까지 찬양하고 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만든 하늘과 달, 별과 바다 각각의 피조물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묘사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오감과 상상력을 통해 자연을 만드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위대함과 완전함에 감탄한다. 게다가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의존하고 있음을 노래한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피조세계를 묵상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것이고, 그를 찬양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 자연을 묵상할 수 있는 장소를 찾는다.

-둘째,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를 마음껏 느끼고, 누릴 수 있도록 성령님의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한다.

-셋째, 우리의 오감인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을 통해 자연과 대화하고, 자연의 세계 속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을 맛본다.(자연과 자연의 현상들을 객관적 관찰의 대상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관계하고 대화는 존재로 대한다.)

-넷째,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미지를 마음에 떠올리며 오감을 통해 맛보고, 냄새 맡고, 듣고, 느낀 것들을 마음에 담으며 숙고한다.

-다섯째, 묵상 노트에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몸으로 느낀 것을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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