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칼럼 유재경 박사의 디바인 포커스
참된 '영성'과 '영성훈련'을 말한다영성학자 유재경 교수가 펼치는 기독교 영성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적 갈증을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 영적 갈증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는가 이것은 딜레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영성과 자기 계발에 관한 도서를 통해 삶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교회, 피정의 집, 마음 수련원, 그리고 템플 스테이 등 다양한 종교 단체를 찾아가 자신의 영적 필요를 채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자연으로 돌아가, 원시적 삶의 형태 속에서 자신의 영적 빈곤을 해결하려 한다.

이와 같이 현대인들의 영적 세계에 대한 추구는 지칠 줄 모른다. 마치 제동장치 없이 달리는 기차와 같다. 이러한 시대적 답답함을 많은 사람들은 영성에게 그 길을 묻는다. 그래서 종교인이든 비종교인이든 ‘영성’이란 말을 무슨 유행어처럼 사용한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인에게 ‘영성’은 무엇이고, 특히 ‘영성훈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영성(spirituality)란 용어를 정확하게 정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영성은 그것의 기원인 기독교적 뿌리와 전통으로부터 너무 멀어졌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는 영성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양한 영성이 존재함을 자연스럽게 이야기 한다. 기독교 영성, 불교 영성, 이슬람 영성과 같이 종교적 영성 있는가 하면 비종교적 영성도 존재한다. 따라서 우리는 영성을 넓은 의미의 영성과 특정 종교에 국한된 영성으로 구분해 설명할 수 있다. 넓은 의미의 영성은 ‘인간의 궁극적 가치를 향한 인간의 진실의 추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산드라 슈나이더는 영성을 ‘소외나 자기몰두가 아닌 궁극적인 가치를 향한 자기 초월을 통해서 삶의 통합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의식적 경험’이라고 했다.

그러면 기독교 영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되는가? 바울은 고린도전서 214-15절에서 ‘영적인 사람’에 대해서 언급했다. 이 영적인 사람은 하나님의 영 안에 사는 사람, 하나님의 성령의 영향아래 사는 사람이다. 초기교회부터 교회는 바울서신에서 언급한 성령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거룩한 삶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중세를 지나면서 교회는 점점 일상적인 삶, 경제적인 삶보다는 내적인 생활, 수덕적 삶, 완덕의 삶을 신앙인이 추구할 이상으로 받아들였다. 중세를 거쳐 근대를 지나면서 영성이 개인의 신앙 경험으로 이해되었다. 무엇보다 오늘날 기독교 영성이 ‘체험’ 또는 ‘경험’이라는 단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사용되고 있다. 따라서 기독교 영성의 정의는 하나님의 체험과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임재와 능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이러한 기독교 영성은 함축적 언어이기 때문에 많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우리가 영성을 이야기할 때 그 영성에는 영적인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육체적 차원, 심리적 차원, 정신적 차원 등이 있듯이 영적인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모습에 따라 그 형상대로 창조되었다”(1:26-27). 칼 라너 또한 ‘인간을 세상 속의 영’이라고 했다. 인간은 세상 속에서 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내면적 차원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영성은 이 영적인 차원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계발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즉 타인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인간의 영적 능력을 현실화하고 실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영적이라고 할 때 이 영적 인간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초월의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셋째, 영성은 사람들의 영적 경험을 언어를 매개로 하여 공식화 또는 체계화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는 영적인 저술, 기도서, 음악 등을 들 수 있다. 넷째, 영성이라는 단어는 기독교인의 영성생활에서 체험된 경험을 연구하는 학문적 체계를 가리킨다. 이와 같이 오늘날 우리가 영성이라고 부를 때 그 용어가 다의적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영성훈련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영성훈련이라는 말을 들으면서 격세지감을 느끼는 것은 수 년 전까지만 해도 경건(piety)훈련이나 헌신(devotion)과 같은 단어들이 우리 귀에 익숙했다는 사실이다. 사실 ‘영성’과 ‘영성훈련’은 로마 가톨릭과 동방정교회에서 즐겨 사용하던 용어이다. 특히 우리 개혁교회 전통에서는 최근까지 ‘영성’과 ‘영성훈련’이라는 용어 보다는 ‘경건’(piety), ‘거룩한 삶’(holiness of life), ‘헌신적인 삶’(the devout life)을 사용해 왔다. 그런데 이 ‘경건’과 ‘헌신’과 같은 말들이 다소 부정적인 어감을 갖게 되었다. 경건이 한 때는 좋은 의미로 사용되었지만 지금은 지나친 감상적 행위, 소심하고 엄격한 도덕심으로 여겨지고 있다. 헌신은 영성이라는 말과 같이 내면 성찰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만 어떤 특정한 대상에 몰두하는 주관적인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로 전락했다. 그러나 영성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는 삶의 방식을 표현하는데 보다 분명하고, 능동적이고, 그리고 객관적인 용어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요즘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표현하기 위해 ‘영성’이라는 용어를 선호하고 있다.

나아가 우리는 ‘훈련’ 또는 ‘형성’이라는 말을 들을 때 다소 혼란스럽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살아가는 우리가 무엇을 훈련하고 무엇이 형성된다는 말인가! 형성이란 용어는 일치, 개선, 변형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형성은 기독교인들을 영적 성숙에 이르게 하는 방법이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처음 창조되었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 다시 형성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훈련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너무 인위적인 의미로 다가온다. 그러나 훈련은 한 개인이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자유롭게 선택한 행동체계를 오랫동안 반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어떤 규칙(rule) 즉 어떤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다. 이 ‘훈련’은 무엇보다 인간의 영성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영성훈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한다. 바울은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 영생을 거두리라”(6:8)고 했다. 영적 훈련도 이와 같다. ‘영성훈련’은 하나님의 은혜로 풍성한 영적인 삶을 살기 위해 씨를 뿌리는 것과 같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일하실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영성 훈련을 실천하는 것 그 자체가 목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한 수단이다. 리처드 포스터는 ‘영성 훈련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단지 그것은 무엇인가가 달성될 수 있는 곳으로 우리를 가져다 놓을 뿐이다. ‘영성 훈련’은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일 뿐이다’라고 했다. 톰슨의 이야기처럼 영성훈련은 ‘은혜가 쏟아져 들어오는 창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느끼는 영적 갈등, 그 해결의 실마리는 어디에. ‘영성’, ‘영성훈련’ 그곳에 길이 있는가!

나는 한 나그네로서 영원을 향한 길을 걸어가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으나 그 형상에 손상을 입었으므로 어떻게 묵상해야 하는지,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도널드 코간(Donald Coggan)

kurios M  webmaster@kuriosm.com

<저작권자 © 큐리오스엠,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kurios M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여백
여백
여백
Back to Top